서로 믿지 못할수록 서류·보증·감시·분쟁은 늘어난다

정치에서도 불신은 공방과 반복검증, 정책 추진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필요한 것은 ‘무조건 믿는 사회’가 아니라 검증하면서도 예측 가능한 사회다

[한국뉴스투데이24=이상록 기자]

믿을 수 없다면 확인해야 한다.

서류를 한 장 더 요구하고,

계약서를 더 길게 쓰고,

보증을 받고,

기록을 남기고,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증거를 보관한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모두 합리적인 행동이다.

문제는 사회 전체가 서로를 믿지 못할 때다.

기업은 거래 상대방을 확인하고,

행정기관은 시민이 제출한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시민은 기관이 제대로 일했는지 또 확인한다.

정치에서는 정부와 야당이 서로의 설명을 의심하고,

여당과 야당은 같은 통계와 사건을 놓고도 상대방의 의도부터 묻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돈만 더 쓰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고,

설명하고,

증명하고,

검증하고,

분쟁하고,

서로의 말을 다시 확인하는 데 시간을 쓴다.

신뢰가 사라진 자리에는 비용이 들어온다.


지난 글에서는 ‘왜 신뢰를 잃는가’를 물었다

「시대의 창」 ③편에서는 **‘설명하지 않는 사회는 왜 신뢰를 잃는가’**를 물었다.

결정의 이유와 기준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빈칸을 추측으로 채우게 되고, 그 추측이 반복되면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질문을 한 단계 더 옮겨보려 한다.

그렇게 신뢰가 무너지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답은 생각보다 구체적이다.

돈을 잃고,

시간을 잃고,

협력의 속도를 잃고,

때로는 장기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유까지 잃는다.

신뢰는 단순히 좋은 사람에게 필요한 도덕적 덕목만이 아니다.

경제와 행정, 정치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자산이기도 하다.

OECD도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가 행정·사회·경제 영역에서 거래에 따르는 부대비용을 낮추고, 정책 준수를 쉽게 하며, 복잡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반대로 낮은 신뢰환경에서는 정부가 복잡한 사회문제와 장기개혁을 추진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본다.


거래가격표에는 나오지 않는 비용

경제학에는 ‘거래비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물건 값이나 서비스 가격만이 거래의 비용은 아니라는 뜻이다.

누구와 거래할지를 찾는 시간,

상대방이 믿을 만한지 확인하는 과정,

조건을 협상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비용,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독하는 비용,

문제가 생겼을 때 분쟁을 해결하는 비용까지 모두 거래의 일부다.

신뢰가 높다고 이런 비용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과 제도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면 불필요한 확인과 중복절차를 줄일 여지가 커진다.

반대로 믿을 수 없다면 확인장치는 계속 늘어난다.

신분을 확인하고,

추가서류를 요구하고,

보증을 받고,

제3자의 확인을 거친다.

계약서에는 예외조항이 늘어나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 책임조항도 더 세밀해진다.

그 비용은 결국 누군가가 부담한다.

기업이 부담하면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나 운영비에 반영될 수 있고,

행정기관이 부담하면 인력과 예산, 처리시간의 문제로 돌아오며,

개인이 부담하면 수수료와 기다리는 시간, 스트레스가 된다.

OECD 역시 신뢰가 사회·경제·행정의 거래비용을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불신의 가장 비싼 비용은 어쩌면 ‘시간’이다

우리는 비용을 이야기할 때 돈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불신이 만드는 비용 가운데 가장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시간이다.

한 번 제출했던 서류를 다시 제출한다.

이미 확인한 사실을 또 설명한다.

담당자는 혹시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걱정해 결재선을 하나 더 올린다.

감사를 대비해 자료를 더 많이 남긴다.

기업은 계약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여러 단계의 검수절차를 만든다.

시민은 기관의 답변을 믿지 못해 같은 문제를 다른 기관에 다시 묻는다.

이런 절차 가운데 상당수는 필요하다.

안전과 공정성을 위해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문제는 정상적인 검증과 불신 때문에 반복되는 중복검증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때다.

그 순간 사회는 실제 일을 하는 시간보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불신의 가장 비싼 비용은 어쩌면 돈이 아니라, 서로를 확인하느라 잃어버리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행정도 신뢰가 없으면 비싸질 수 있다

행정기관의 모든 규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안전과 세금, 복지와 계약처럼 공공성이 큰 분야에서는 확인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오히려 검증이 부족하면 부정수급과 횡령, 부실공사와 안전사고 같은 더 큰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일부의 위반을 막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서류와 확인절차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행정은 복잡해진다.

처리기간도 길어질 수 있다.

행정기관 역시 그 절차를 운영하기 위해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사용해야 한다.

결국 시민은 묻게 된다.

“왜 이것을 또 확인해야 합니까.”

행정기관은 답할 수 있다.

“사고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핵심은 규제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검증과 단순히 불신이 누적돼 만들어진 중복절차를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정치의 불신도 공짜가 아니다

정치에서 불신의 비용은 더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국회가 서로 믿지 못한다고 국민에게 곧바로 청구서가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불신 역시 비용을 만들 수 있다.

법안 하나를 논의할 때 내용보다 상대방의 숨은 의도부터 의심한다.

인사를 놓고 자격검증보다 정치적 배경에 대한 공방이 먼저 커질 수 있다.

정책을 발표하면 정책의 효과보다 “왜 지금 발표했느냐”는 논쟁이 앞설 수도 있다.

정부는 야당이 발목을 잡는다고 하고,

야당은 정부가 국회를 무시한다고 한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국정감사와 청문회, 자료요구, 언론의 검증과 시민사회의 감시는 민주주의에 필요한 비용이다.

그 비용을 없애자는 주장은 위험하다.

권력은 검증받아야 하고,

정부는 국회에 설명해야 하며,

야당은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

문제는 검증에 비용이 든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한 번 확인된 사실과 합의된 절차조차 서로 인정하지 않아 같은 검증을 정치적 공방 속에서 계속 반복하게 되는 경우다.

필요한 견제비용과 불신이 만드는 중복비용은 구분해야 한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신뢰를 말해야 하는 이유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면 같은 시기의 대통령 국정평가조차 조사기관과 조사방법에 따라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차이를 보인다.

NBS는 전화면접 방식으로 46%, 한국갤럽 역시 전화면접으로 39%를 기록했다. 서로 조사기간과 질문, 표본추출 방식 등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골라 ‘진짜 민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숫자 경쟁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결과를 볼 때 조사방법과 질문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치에서는 같은 숫자를 놓고도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조사만 선택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 순간 여론조사는 국민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보다 진영 간 논쟁의 무기가 되기 쉽다.

OECD의 2025년 한국 조사에서는 중앙정부를 높거나 중간 이상으로 신뢰한다는 응답이 51%, 정당에 대한 신뢰는 29%로 나타났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정치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느끼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의 중앙정부 신뢰 격차는 54%포인트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중요한 주의가 필요하다.

OECD의 ‘중앙정부 신뢰’와 국내 여론조사의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는 측정하는 개념과 질문이 다르다. 두 숫자를 직접 비교해서는 안 된다.

또 정치적 목소리를 느끼는 정도와 정부 신뢰 사이의 격차 역시 정치적 참여감이 낮기 때문에 정부를 불신하게 됐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수치는 아니다.

다만 정치적 참여감과 정부 신뢰 사이에 강한 연관성이 나타난다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다.


불신이 커지면 장기정책도 어려워질 수 있다

연금,

주택,

교육,

에너지,

국방,

기후변화 대응 같은 문제는 한 정권의 임기 안에서 끝내기 어렵다.

10년, 20년을 바라보고 결정해야 하는 정책이 많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존 정책이 전면 재검토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정부는 야당과 합의해도 다음 선거 뒤 정책이 뒤집힐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야당은 정부가 추진하는 장기계획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정책 추진은 어려워질 수 있다.

정책결정이 늦어질 수 있고,

예산집행이 지연될 수 있으며,

정책 담당자는 정치적 논란을 우려해 결정에 더 소극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기업과 지방정부 역시 장기간 유지될 정책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투자를 미루거나 기다릴 수 있다.

OECD도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가 낮으면 복잡한 개혁과 장기정책을 추진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불신은 사회를 조심스럽게 만들지만, 지나친 불신은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냥 믿자는 말인가

아니다.

신뢰를 강조한다고 권력을 의심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사기와 횡령은 존재한다.

기업의 부실관리도 있고,

행정기관의 잘못된 판단도 있으며,

정치인의 거짓말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검증은 필요하다.

감사도 필요하고,

언론의 취재도 필요하다.

국회의 견제도 필요하며,

시민의 문제제기도 필요하다.

OECD 역시 민주주의에서 높은 신뢰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공적 감시와 ‘비판적으로 검증하면서 갖는 신뢰’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민주주의에서 좋은 신뢰는 권력을 의심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검증할 수 있고 잘못하면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에 매번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가깝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의심하지 않는 사회’가 아니다.

적은 비용으로 믿을 수 있는 사회다.

규칙이 분명하고,

기준이 공개돼 있고,

같은 상황에는 비슷한 판단이 내려지고,

잘못했을 때 책임을 물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제도가 작동하는 사회다.

사람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통해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신뢰를 높이는 방법은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믿어달라고 한다고 신뢰가 생기지는 않는다.

기업이 고객에게 믿어달라고 광고한다고 신뢰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정치인이 자신의 진정성을 주장한다고 국민이 자동으로 믿는 것도 아니다.

신뢰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약속한 기준이 지켜지고,

잘못된 결정은 수정되고,

설명이 달라졌다면 그 이유를 밝히고,

특정한 사람에게만 예외가 적용되지 않을 때 조금씩 쌓인다.

그래서 신뢰는 말보다 구조에 가깝다.

누가 담당자가 되더라도 비슷한 기준이 적용되고,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질 것이라는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좋은 제도는 사람을 무조건 믿게 만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을 덜 의심해도 되게 만드는 제도다.


AI 시대에는 신뢰비용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은 확인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문서를 빠르게 비교하고,

거래기록을 분석하며,

이상패턴을 찾아내고,

행정절차를 자동화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 방향도 가능하다.

가짜 문서와 이미지·영상의 합성이 쉬워지고,

그 결과물이 진짜인지 확인해야 하며,

AI가 만든 답변이 맞는지 다시 검증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날 수 있다.

OECD 조사에서도 정부의 AI 활용에 대해 효율성이나 서비스 개선에 대한 기대와 함께 공정성, 개인정보보호, 투명성, 인간의 감독에 대한 우려가 동시에 나타났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를 얻는 비용은 낮아질 수 있지만,

그 정보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비용은 커질 수도 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단순한 정보량이 아니다.

어떤 정보를 믿을 수 있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잘못됐을 때 어떻게 바로잡는가.

이것이 중요해진다.


신뢰는 공짜가 아니지만 불신은 더 비싸다

신뢰를 만드는 데도 비용이 든다.

투명한 시스템을 만들고,

감사제도를 운영하고,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며,

정보를 공개하는 데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뢰가 높으면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신뢰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검증과 감시에는 비용을 써야 한다.

하지만 그 비용에는 목적이 있다.

한 번 제대로 된 기준을 만들어 이후 사람들이 예측 가능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비용이다.

반면 불신이 만드는 비용은 반복될 수 있다.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의심하고,

분쟁하고,

결정이 바뀔 때마다 다시 처음부터 검증한다.

그 차이가 중요하다.

신뢰를 만드는 비용이 사회의 기반시설을 만드는 비용이라면,

불신의 비용은 같은 길을 갈 때마다 통행료를 다시 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검증하고 있는가

우리는 안전을 위해 확인한다.

공정성을 위해 감시한다.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견제한다.

그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질문은 계속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확인은 실제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확인된 것까지 서로 믿지 못해 계속 같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정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국회에도 적용된다.

기업에도 적용된다.

언론에도 적용되고,

시민에게도 적용된다.

신뢰는 어느 한쪽이 요구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

잘못을 인정하는 조직,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제도,

사실이 확인됐을 때 자신의 판단도 수정할 수 있는 시민이 함께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더 잘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득과 성장률만이 아니다.

서로를 확인하고 의심하는 데 쓰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신뢰가 무너지면 모두가 더 비싸게 산다.

돈만 더 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더 내고,

기다림을 더 내고,

갈등을 더 내며,

때로는 미래의 결정을 미루는 비용까지 부담한다.

그래서 좋은 사회는 무조건 서로 믿는 사회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검증할 수 있고,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그래도 매번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신뢰는 감정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