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에 기대는 사회에서 제도를 신뢰하는 사회로
좋은 사람이 와야 일이 제대로 된다는 조직은, 이미 제도가 약하다는 뜻일지 모른다.
유능한 공무원이 오면 민원이 풀리고, 좋은 책임자가 오면 조직이 달라지고, 양심적인 기자가 있으면 언론이 바로 선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너무 자주 듣는다.
그러나 사람이 바뀔 때마다 결과와 기준도 함께 바뀐다면, 그것은 좋은 사람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일까.
아니면 좋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진 제도의 문제일까.
사회의 수준은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보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도록 제도가 설계되어 있는가에서 드러난다.
선의만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을까
사람의 선의는 소중하다.
하지만 선의만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는 없다.
사람은 실수한다. 이해관계 앞에서 흔들리기도 하고,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사람의 선의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선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제도를 만들었다.
법이 있고, 절차가 있고, 기록이 있고, 감시와 견제가 있는 이유다.
좋은 제도란 사람을 믿지 않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일하더라도 사회가 일정한 원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좋은 사람이 있어야만 작동한다면
문제는 좋은 사람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좋은 사람에게 의존해야만 제대로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담당자가 누구냐에 따라 같은 민원의 결과가 달라지고, 책임자의 성향에 따라 조직의 원칙이 달라지며, 권한을 가진 사람이 바뀔 때마다 기준까지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까.
시민은 좋은 사람을 기억할 수는 있어도 제도를 신뢰하기는 어렵다.
선의와 개인 역량에 대한 의존이 커질수록 판단의 편차도 커질 수 있다. 그 편차가 반복되면 다음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예측하기 어려운 제도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제도의 역할은 모든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누가 그 자리에 오더라도 권한의 한계를 알게 하고, 판단의 근거를 남기게 하며, 잘못된 결정은 다시 검토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좋은 제도의 기준은 완벽한 사람을 전제로 하는가가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과 함께서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가에 있다.
제도만 잘 만들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그렇지는 않다.
규정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조직은 경직될 수 있다. 책임 있는 판단보다 “규정대로 했다”는 말이 앞서는 관료주의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사람과 제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좋은 사람에게는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고, 좋은 제도에는 책임 있게 운영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이 신뢰다.
신뢰는 숫자가 아니라 경험에서 만들어진다
OECD가 2026년 발표한 조사에서 한국 국민의 중앙정부 신뢰는 2025년 51%로 나타났다. 2023년 37%에서 변화한 수치다. 공무원 조직에 대한 신뢰는 41%로, OECD 평균 45%보다 낮았다.
그러나 이 변화를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정부에 대한 신뢰에는 정치적 효능감, 정파적 지지, 경제적 불안, 교육 수준을 비롯한 여러 조건이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순히 신뢰가 올랐느냐, 내렸느냐가 아니다.
신뢰는 고정된 감정이 아니라 시민이 제도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화한다.
OECD는 공공기관 신뢰를 설명하는 주요 거버넌스 요인으로 신뢰성, 대응성, 공정성, 청렴성, 개방성을 제시한다.
시민에게 제도는 거대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민원 하나를 처리할 때 같은 기준이 적용되는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제대로 검토되는가.
결정의 이유를 설명받을 수 있는가.
시민은 이런 일상의 경험을 통해 제도를 판단한다.
결국 신뢰는 구호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쌓아가는 것이다.
언론의 신뢰도 좋은 기자 한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좋은 기자 한 사람의 양심만으로 신뢰받는 언론을 만들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 취재원을 검증하는 기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편집 원칙, 잘못된 보도를 바로잡는 시스템이 함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양심은 출발점이다.
그러나 양심이 조직의 신뢰가 되려면 원칙과 시스템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원칙은 언론뿐 아니라 기업과 학교, 공공기관과 시민단체에도 적용된다.
AI는 이 오래된 문제를 다시 묻는다
그리고 AI는 이 오래된 문제를 새롭게 드러내는 시험대다.
AI가 행정·금융·교육·언론의 판단 과정에 더 깊이 들어올수록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누가 판단 기준을 정하는가.
그 판단은 설명할 수 있는가.
잘못된 결정은 누가 발견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책임은 누가 지는가.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이 질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강력해질수록 검증 가능한 원칙과 책임 구조는 더 중요해진다.
「시대의 창」 제1회가 ‘AI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물었다면,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묻는다.
그 판단을 사회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
좋은 사회는 좋은 사람만 많은 사회가 아니다
좋은 사회에는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사람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만으로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사회는 좋은 사람만 많은 사회가 아니다.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함부로 할 수 없고, 평범한 사람도 책임 있게 일할 수 있도록 제도가 작동하는 사회다.
사람이 바뀌어도 원칙이 유지되고, 권한을 가진 사람이 바뀌어도 절차가 작동하며,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이 적용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시민은 사람의 선의를 넘어 제도 자체를 신뢰할 수 있다.
「시대의 창」은 사실을 바탕으로 시대를 설명하고, 질문을 통해 독자의 사고를 확장하고자 한다.
오늘의 질문
우리는 지금 좋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불완전한 사람과 함께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좋은 제도를 만들고 있는가.